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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문화회관 BONGSAN Cultural Center

Bongsan cultural center

공연/전시안내

전시일정

작품이미지
전시명
기획 기억공작소 권오봉
전시기간
2014년 11월 19일(수) ~ 2015년 01월 18일(일)
관람시간
10:00~19:00 (월요일 휴관)
오픈일시
2014년 11월 19일(수) 오후 6시
장 소
4전시실
작 가
권오봉
장 르
서양화
문 의
053)661-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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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10주년 봉산문화회관기획 - 기억공작소展
Kwon O-Bong

201411




  ■ 전 시 명 : 2014기억공작소展 「권오봉」
  ■ 기    간 : 2014년 11월 19일(수) ~ 2015년 1월 18일(일), 61일간(월 휴관)
  ■ 관람시간 : 10:00 ~ 19:00
  ■ 장    소 : 제4전시실
  ■ 참여작가 : 권오봉
  ■ 오 프 닝 : 11월 19일(수) 오후 6시
  ■ 주    최 : 봉산문화회관
  ■ 문    의 : www.bongsanart.org 053-661-3521 트위터(@bongsanart), 페이스북(bongsanart)


▢ 전시소개
기억 공작소Ⅳ『권오봉』展

‘기억 공작소(記憶工作所, A spot of recollections)’는 예술을 통하여 무수한 ‘생’의 사건이 축적된 현재, 이곳의 가치를 기억하고 공작하려는 실천의 자리이며, 상상과 그 재생을 통하여 예술의 미래 정서를 주목하려는 미술가의 시도이다. 예술이 한 인간의 삶과 동화되어 생명의 생생한 가치를 노래하는 것이라면, 예술은 또한 그 기억의 보고(寶庫)이며 지속적으로 그 기억을 새롭게 공작하는 실천이기도하다. 그런 이유들로 인하여 예술은 자신이 탄생한 환경의 오래된 가치를 근원적으로 기억하게 되고 그 재생과 공작의 실천을 통하여 환경으로서 다시 기억하게 한다. 예술은 생의 사건을 가치 있게 살려내려는 기억공작소이다.

그러니 멈추어 돌이켜보고 기억하라! 둘러앉아 함께 생각을 모아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금껏 우리 자신들에 대해 가졌던 전망 중에서 가장 거창한 전망의 가장 독특한 해석과 그들의 다른 기억을 공작하라!
또 다른 기억, 낯선 풍경을….

그러고 나서 그런 전망을 단단하게 붙잡아 줄 가치와 개념들을 잡아서 그것들을 미래의 기억을 위해 제시할 것이다. 기억공작소는 창조와 환경적 특수성의 발견, 그리고 그것의 소통, 미래가 곧 현재로 바뀌고 다시 기억으로 남을 다른 역사를 공작한다.

하나, 선과 무의미
권오봉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캔버스 위에 거침없이 질주하듯 그은 선(線)들로 연결된다. 2005년 시공갤러리 전시 서문에 남긴 전희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선은 “구체적 대상을 증발시킨 순수 가능태로의 환원을 말하는” 외침이고, 그의 행위는 “작가를 지워버리는”, “이미지들 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해체하는” 격렬한 파괴행위이며, 자유에 동승하는 순수유희이다. 이러한 상황들을 기존의 가치에 대한 거부와 부정의 실천이라고 이해한다면, 왜 권오봉은 회화라는 고전적인 가치의 무의미를 회회라는 방식 안에서 대응하려는 것일까?

둘, 분비물
권오봉의 작업은 이성과 감성이라는 다른 해석 기반에서 살펴보더라도 ‘신체행위’라는 플랫폼에서 서로 해후(邂逅)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신체행위’를 떠올리면 얼마 전의 단호한 진술이 기억난다. 이강소는 “비디오아티스트1978”전시 인터뷰에서 머리로만 하는 논리 중심의 서구 개념미술과 구별되는 자신과 동료들의 태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신체행위와 정신과 세계를 유기적으로 일체화시키는 상태의 작업태도를 ‘신체적인 예술’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이처럼 ‘신체행위’는 동시대 미술을 이해할 때 주목해야할 요소이며, 권오봉의 신체행위는 전방위적인 에너지가 넘쳐나듯 격렬하고, 마치 ‘행위하는 나 자신’을 향하여 일치의 그리움을 토로하듯이 열정적이다.

이번 기억공작소 전시는 특정 장소의 사태를 정교하게 옮겨 그리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사용하면서 온통 물감 범벅이 된 이젤과 테이블, 간이의자, 물감을 개는 그릇과 그것들을 씻던 개수대와 그 위의 선반, 넓은 캔버스 면에 물감을 펴 바를 때 사용하는 밀대와 막대걸레, 캔버스 표면의 물감을 긁는 갈쿠리, 그리고 바닥에는 오랜 세월동안 흐르고 뿌려지고 흩어졌던 물감 자국들이 묵혀놓은 듯 쌓여있다. 권오봉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봐왔던 정병국은 이 전시 사태를 한마디로 ‘분비물’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했다. 분비물(分泌物, secretion)…? 분비물은 배설물과는 다르게 세포가 섭취한 외부물질을 대사하여 밖으로 방출하는 생체에 유용한 물질이다. 살아있는 식물은 토양에서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고 각종 유기물을 분비하며, 천연향료인 사향(麝香, musk)과 조개의 체내에서 생기는 진주(眞珠, pearl)가 대표적인 분비물 성형체이다. 곤충의 변태과정에서 생기는 고치(cocoon)도 분비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들은 대체로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생존하려는 목적으로 생성된다. 이런 면에서 권오봉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번 전시물을 ‘분비물’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셋, 그 태도
권오봉은 자신이 회화(繪畫, painting)에 적극적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그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는 평면 위에 색을 섞고 윤곽을 구획하는 회화의 심지, 즉 회화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유사성과 심증을 좇아 끊임없이 화면을 긋고 지우고 긁은 것이 아닐까? 그가 내뱉는 ‘무의미’는 자신이 찾고 있는 그것이 자신을 빌어서 세상에 나가기에 더 이상의 의미를 보태지 말아달라는 겸손이며,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원초의 신체행위와 그 숨은 뜻을 눈치 채는 유희를 감추려는 심사가 아닐까싶다. 실험적인 ‘동시대 미술의 태도’들을 소개하려는 이 전시에 작가는 보이지 않는다. 변태를 향한 고치를 닮은 이번 사태에 관객이 몰입하면서, 과연 작가의 그 태도를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작업 태도는 이미 껍질이 된 기성 언어를 끊임없이 거부하려는 혼신의 신체행위를 통하여 회화의 본성, 자유와 순수유희, 진정한 인간 생의 본질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기술한다. 삶의 소환과 동시대적 해석으로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업과 태도에 대한 기억이고, 또 다른 ‘낯선 기억’으로서 미래의 어떤 순간과 이어질 우리들 태도의 환기구이다.

봉산문화회관큐레이터 정종구



▢ 전시이미지

201411
4전시실 설치전경



▢ 작가노트

예술의 힘    


힘을 발휘하고 성취한다는 쪽에 두고서 힘과 무력함을 나눌 때 우리의 힘에 대한 이해는 아직 편협하고 옹졸하기만 하다. 승리의 쾌재가 패배의 두려움을 모면했다는 안도감과 다를 바 없다면 힘의 확인 과정은 무력함의 은폐 과정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자신의 힘에 속거나 배반당한 이는 많아도 자신의 무력함에 속거나 배반당한 이는 없으니….

누구나 무력함보다는 힘을 원한다. 아무도 무력감에 사로잡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데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은 바로 진실로 열리는 창이니, 누가 알리오, 인간은 힘을 원하는 가운데 진실로 열리는 창을 닫고 있을는지. 아무도 무력감에 사로잡히기를 원치 않는 까닭은 바로 무력감은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폭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력감에 의한 폭력이며, 다른 하나는 힘에 의한 폭력이다. 무력감에 의한 폭력은 자신을 제물로 가해지는 반면, 힘에 의한 폭력은 타자를 제물로 하여 가해진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폭력을 가할 줄 모르는 자일수록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기 마련이다.

무력함에 사로잡혀 보지 아니하면 실로 무엇이 힘이 되어주는지 알지 못하며 또 실로 힘이 되어 주는 것을 찾지도 않는다.

무력함은 힘이 뜻에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요, 또 힘이 되어주고자 하는 힘일수록 뜻에 미치지 못한다. 무력감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되어주지 못할 때 엄습해오는 것이리라.

꿈은 뜻은 있으나 뜻대로 할 수 없음에 따라 피어나는 것이기에 자신의 무력함 속에서 피어날 뿐이다. 예술은 인간의 꿈을 통해 열리는 영역이기에 오직 무력한 이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영역이다. 꿈은 무력한 이들만의 특권이다.

“자연은 언제나 같은 자연이지만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에게 나타난 것으로부터 남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세잔느)



▢ 참고자료
자료1. 권오봉展(2005.4.20~5.17 / 시공갤러리, 우손개러리) 전시 서문

무의미로의 자기 동기화

그린다는 동사는 언제나 ‘무엇을’에 해당하는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더욱이 백색의 침묵하는 화면은 그리는 것을 업으로 살아가는 화가들에게는 강박적 옥죔으로 작용할 것이다. 현실적 지평과 괴리되는 독창성에 대한 독촉과 이에 따른 결과물로 화가 자신조차도 불확실한 몸짓에 타인으로부터 어떠한 이해를 구해 받을 것인가? 위대한 전범(典範)들에게서 물려받은 부채를 감당해가며 어떻게 미래의 새로운 지각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당면한 시대를 유희로 답하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실천으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존재가 예술가가 아닌가? 그러기에 단 한명의 잉여적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예술가에게 허락된 캔버스는 삶을 자각하게 하는 절실한 매개인 것이다.

권오봉의 작업은 외현적으로는 선(線)을 실현한다. 구체적 대상을 증발시킨 순수 가능태로의 선들이다. 규칙적이기도 하고 불규칙적이기도 하면서 집중되기도 하고 확산되어나가기도 한다. 그것들은 미적으로 거리를 두면서도 어떠한 개념화로도 정초(定礎)되지 않는다. 그저 화면에 그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만족하는 것 같다. 세상에 던져진 우연적 소산이라고 말하듯 선들은 화면너머의 이상과도 작가에게서 비롯된 타율성과도 절연한다. 그것은 오직 의미를 두지 않음, 즉 무의미인 것이다.

그러다 다다와 초현실주의가 합리적 이성에 반대하기 위해 가지고 온 우연적 기법이 결국 ‘암시’와 ‘연상’작용이라는 전달과 수용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었듯이 캔버스라는 자기장 위에서 의미화로부터의 이탈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무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함이라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권오봉의 선(線)은 이러한 무의미적 순수태(純粹態)로의 환원을 ‘말함’이다. 그에게 그리는 행위, 즉 캔버스 위에 대상을 그린다는 것, 색을 칠한다는 것은 생산적 입장에서는 롤랑바르트에게서처럼 펜 끝에 존재하는 작가를 지워버리는 행위이며, 결과론적으로는 슈비터즈의 ‘메르츠(Merz)’에서처럼 이미지들 간의 유기적 연관성을 해체하는 일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것은 기존의 가치들을 의식적으로 부수려고 하는 반항의 살아있는 정신이며, 표상과 실재간의 명중성을 회의하는 의미없음의 실천이다. 사실 역사는 기존의 가치들과 반항이라는 수많은 안티테제들간의 역동성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가 아닌가?

하지만 반항이라는 것은 상대를 절대적 성역으로 바라볼 때 일어난다. 무언인가를 타파하고자 하는 적극적 행위는 대상에 대한 철저한 반성적 사고와 소속감 속에 있을 때 이루어진다. 죽음에의 충동이 강한 삶에의 집착에서 비롯되듯 그의 무의미 또한 의미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고 다시 걷어내는 행위, 제도적으로 익은 손재주를 피하기 위해 붓 대신 끌어들인 중성적 매개물, 그러한 것들은 작가가 무의미를 말하면서도 캔버스를 버리지 못함을 역설한다.

그의 무작위적 선들이 일견 자유롭고 유희적인 외현을 지니고 있어 동양적 선사상과 같은 긍정적인 관념론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거기에만 머무르기에는 정도를 넘어서는 어떤 격렬함과 잉여가 있다. 그것은 회화의 무의미를 회화로 응답하는 질문과 대답 가운데 초극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작가의 분투하는 행위에서 드러난다. 게다가 그 행위가 어딘가를 향해 외치는 반성적 고백과 고발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권오봉의 그림이 주는 진정함은 무의미라는 파괴에서 찾은 자유이며, 제도적 답습을 표백시킴으로 얻은 순수함으로의 유희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대하면서 우리는 막연한 관념론적 자유나 유희의 피상성을 넘어 신탁 없는 굿을 동기화하여 혼신을 다함을 자각하는 예술가의 행위에서 오는 파토스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전희정, 시공갤러리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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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 권오봉展(2009.5.1~5.16 / 리안갤러리) 전시 서문

사랑의 고백 ● 그는 말한다. 억지로 그림을 그린다고. 억지 그림. 그래서 자신이 보기에 그가 그린 그림은 늘 서툴고 못났는가 보다. 이 서툴고 못난 그림을 행여 누가 볼까 마냥 쑥스럽고 조마조마한지, 자신의 그림을 걸어 놓은 전시장에 조차 그는 얼굴 내기를 꺼린다. 부끄럽기는 부끄러운 모양이다. 차마 벽에 걸린 저 부끄러운 그림들도 사실은 지워지고 버려지고 사라진 그의 수많은 그림들 속에 숨어 있어야 할 것들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한 번 물어보자. 그는 왜 부끄러울까? 무엇이 그의 얼굴을 가리게 하고 무엇이 그의 그림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까? 더 잘 그릴 수도 있는 데 하는 아쉬움 섞인 겸허일까? 화가의 부끄러움은 겸허와는 다르다. 더구나 겸허는 자칫 위선의 너스레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의 그림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에 관한 부끄러움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의 부끄러움은 이러 저러한 아쉬움에 따른 반성의 부끄러움이 아닌 보다 근본적 회화적 감성에 관계하는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에서 한 화가의 정신적 태도보다는 감성의 결을 읽어야 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 않다.

나는 서투른 화가여요. / 잠 아니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이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샘이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 그러나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한용운, 「예술가」중)

그렸습니다, 지웠습니다. 화가의 부끄러움은 잘 그리지 못한 데 대한 유감보다는 지우지 않을 수 없다는 회한 가운데 그려진다. 화가라면 그 누구라도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야 영롱하겠지만 차마 다하지 못한 듯 지워지는 부끄러움에 화가의 구슬픈 감성의 고백이 있다. 그렸습니다, 지웠습니다. 그의 선은 분명 찾으려 그은 선이건만 자꾸만 부서지고 내던져지고 지워지고 버려진다. 찾던 것이 없어지는 그 자체를 보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찾으려 그은 선이었다면, 찾을수록 지워진다면 결국 그는 그어서는 그어서는 아니 될 선을 긋고 있는 셈이다. 왜 그리느냐고? 그는 결코 손에 붓을 들고 앉아서 생각에 잠기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을 털고 일어서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CONFESSION. 그렇게 그는 버리기 위해 그리는 괜한 짓을 억지로 하고 있다.

괜한 짓. 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자. 무엇이 그의 선을 괜한 짓이 되게 하는가. 억지로 그은 선이라지만 그가 선을 괜히 그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이었는지도 모른다. 놀이처럼 그냥 해 본 짓거리라지만 실제로 놀이만큼 진지한 일도 없다. 아이들의 놀이가 그렇다. 니체의 말처럼 인간의 성숙이란 따지고 보면 어릴 적 놀이에 쏟은 진지함을 되찾는 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는 장난 삼아 그은 선이라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선은 더더욱 진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 수사와 변명을 모르고 기량과 세련에 아랑곳 않는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선. 그만큼 그의 선은 눈치를 모르는 바보같이 솔직한 선이다. 눈치로 살찌우고 있는 오늘의 미술을 생각하면 그의 그림은 참 가난하면서도 꿋꿋하다. 누군가 예술가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라 하였지만 가난은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의 선은 궁리하고 쌓아가는 선이 아니라 던지고 버리는 선이다. 버리는 선이기에 그의 선은 주저를 모르고 유감을 모른다. 이렇게 미련을 남기지 않는 그의 선은 삽시간의 방향과 각도만을 애정의 슬기로운 밑천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림도 사랑의 장난과도 같은 일일까. 진지함마저 유감없는 장난인양 서둘러 (억지로) 그은 그의 선은 언제나 괜한 짓이 되고 만다. 참다 참다 연인에게 억지로 불쑥 털어놓은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가 어쩌면 그렇게 쑥스러워 차라리 말하지 말아야했던 괜한 말이 되고 마는 것처럼. LOVE. 어쩔 수 없어 숨길 수 없었건만, 하고 나면 괜한 말. 사랑은 표현에 있지 않은 듯 만해는 그의 '님의 침묵' 서시를 군말이라 이름 하였다. ● 그래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격한 감정이나 울분의 토로라 말하지 않는다. 화가는 결코 우기거나 외치지 않는다. 잭슨 폴락은 격정으로 땅에 몸을 뉘여야 했고 고흐의 격정은 밤하늘의 별로 꽃피운다. 그에게도 격정이 없지는 않다. 화가의 격정은 내어지르는 격정이 아니다. 그의 격정의 검은 선도 사실은 화폭 아래 잠겨있던 어둠의 잠깐의 빛나는 선의일 뿐이다. 화가의 격정은 그 힘을 간절함에서 길어온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쩔 수 없으면서도 괜한 장난이라는 속절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일까 이따금 간신히 그어지는 그의 곱고 가난한 선의 맑고 애처로운 아름다움은 못 다한 순정의 설움과도 같아 보인다.

어쩔 수 없으나 괜한 마음을 순정 아닌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다하고도 못다 함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순정. 그 못다 한 부끄러움이 자신을 던져 스스로를 있게 할 수 있는 절실한 이유이기에 순정은 곧 자유다. 자유란 다름 아닌 자신을 던져 바치는 것을 말한다. 연애는 자유다. 자신을 던지는 연애를 우리는 헤프다 말하지 않는다. 자유는 알뜰한 구속을 받고 있기에. 다름 아닌 꿈의 알뜰한 구속을. 그 자체로서는 비어 있는 괜한 꿈의 장엄한 구속을. 자유가 고독한 것은 이 때문인가.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좋은 /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한용운, 「군말」중)

이달승,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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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 권오봉의 작업 소개(2009년 9월호 아트인컬쳐, 96페이지) 글

권오봉의 작업을 음악에 비유한다면 ‘락’이라 할 수 있다. 하드락 기타의 강렬한 리프와 비트가 선들을 따라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화면 위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선들은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그의 천진난만함과 닮아 있다. 오랜 침묵을 깨고 4년 만에 개인전을 가진 작가 권오봉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자.
 

현대인들이 미술에서 찾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뛰어난 아티스트, 곧 그의 재능이다. 재능에 대한 찬미가 화제가 될 때 정작 작품에 대한 질문은 찬미 속에 가려지기 쉽다. 가령 미니멀 아티스트들의 작업은 겉보기에는 조용하니 최소한이지만 정작 사람들 사이의 반향은 떠들썩한 숭배에 가깝다.
미니멀 아티스트의 작업은 사실 작가의 개입을 절제하고 최소화하여 작품이 줄 수 있는 일체의 환영의 기미를 거절하자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뒤샹의 교리를 따른 사물의 선택을 자신들의 유일한 수고로 삼을 때 우리가 그들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덩그러니 사물뿐이다.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미한 자기 지시에서 금욕은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작업에 관한 그들의 절제와 금욕은 신앙에 이르지만 작품의 효과는 명성을 안겨준다. 최소의 제스처가 낳은 최대의 효과. 효과의 조명 아래에선 절제와 금욕마저 재능이란 이름으로 보상받는다. 더구나 기계적이고 물리적이기도 한 미니멀리즘의 금욕적 즉물성은 동양정신의 깊이로까지 그 의미망을 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그들의 재능에 갈채를 보내는가? 도대체 왜 재능인가? 농사일이나 공장 일을 말하면서 우리는 재능을 말하지 않는데 왜 미술을 말하면서 재능을 말하는가? 미술에서 재능을 말하면서 우리가 동경하는 것은 예외적인 권리를 지닌 예술가이다.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뛰어난 아티스트라 부른다. 그를 굳이 저 먼 곳으로부터의 은총이라 믿으며 숭배를 아끼지 않을 때 우리에게도 보상이 없지 않다. 예술가의 재능에 대한 우리의 미신에 가까운 경의는 사실 우리의 초라한 보존 생리에 관계하고 있다. 니체식으로 말해서 예술가의 별도의 재능에 대한 경의는 우리의 허영과 우리의 자존심에 관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자존심이 상하지 않기 위해 그들의 재능을 우리와는 먼 곳에 있는 하나의 우연이나 기적처럼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술가에 대한 경의를 풀고 허영을 버릴 때 우리는 그에게 조금은 더 인간적으로 다가서게 된다.
그런데 예술가 또한 사람들의 미신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경이로운 능력에 힘입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믿음을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삶의 경작에서 ‘밭고랑은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예술가와 사람들 사이에는 함께 걸으며 그어가야 할 저마다의 고랑이 있는 것이다. 클레의 말처럼 “예술가와 문외한에게는 공통의 영역이, 예술가가 반드시 예외적 경우로 등장하지 않는 그러한 만남의 장소가 진정 존재해야 한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저마다 멋모른 채 낯선 밤길에 던져진, 그저 그렇게 서툴고 어렵게 자신을 되찾아 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권오봉의 때로는 휘갈긴, 때로는 서툴게 그은 선은 그 길에서 만나는 원초의 몸짓과도 같다. 그런데 담벼락에 그은 아이들의 낙서나 선사 시대 동굴 어두운 암벽에 그어진 선에서 글도 그림도 아닌 어떤 서툰 흔적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순간 문득 침묵 속의 인기척과도 같은 어떤 부름에 휩싸인다. 그런데 그 부름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권오봉의 작업은 어떠한 회화적 관례나 기량으로부터도 떠나 있다. 그의 작업에서는 우선 눈이 주도하는 회화적 관례가 기능을 멈춘다. 가령 눈을 감고 긋거나 긁기를 마다않듯이 그의 그림에는 시각적 통제나 조정의 장치가 없다. 그리고 손 또한 어떠한 회화적 기량에 대한 부담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조형적 효과를 위한 일정의 개성적 기량을 요구하는 붓을 버리고 대신 빗자루 갈퀴 꼬챙이 나이프 등 긋거나 긁는다는 행위의 익명의 흔적만을 신속히 담아낼 수 있는 작업 도구를 택하면서 그는 결국 눈, 손, 작품으로 이어지는 회화라는 이름의 숭고한 재능의 서명 과정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무기교의 기교
관례와 기량을 훌훌 털고 그는 서슴없이 긋고 긁고 지우고 내던지며 말한다. “어, 이래도 그림이 되네”. 그렇다. 그는 ‘이것이 그림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그림이다’는 말은 ‘이것이 나의 재능이다’라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재능의 의미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잘 그린다 못 그린다의 구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어, 이래도 그림이 되네”하고 말할 때 우리는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구분에서 벗어나 순수한 가능성으로서의 미술을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의 그림은 도대체 누가 그린 것일까?
눈감고 아무런 물건이나 집어 들었으니 그는 혼돈의 어두움에 맡겨진 셈이다. 사실 그의 그림은 원래가 어두운 바탕 속에 감춰진 빛나는 검은 선을 되찾아 내는 일이기도 하다. 마치 별 아래 사막의 고요 속에서 무언가 빛나는 것을 찾던 어린 왕자처럼, 그러나 혼돈은 흔히 생각하듯 질서의 반대말 무질서가 아니다. 혼돈은 오히려 우리가 잃고 있는 원초성에 대한 환기 혹은 향수와 관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권오봉이 길동무라 여겼던 톰블리의 혼돈으로 깨어나는 향수처럼, 혼돈은 잃어버리고 되찾을 수 없는 질서를 일깨우는 질서, 그래서 우리는 카오스를 이야기할 때 코스모스를 함께 이야기한다. “어, 이래도 그림이 되네”
이상한 것은 권오봉이나 톰블리의 그림을 보면 물론 제각기 그리움의 화살이 어느 곳을 향하는 가는 알 수 없다하더라도 일단은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렸구나하는 생각은 잠시 거두게 된다. 그리고, “어, 누가 여기서…” 그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화가의 그림자 곧 인격으로서의 사람이다. 아이건 어른이건….
‘날은 어두워지고 함께 놀던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는 무심코 나무 막대기를 집어 들고 담벼락을 이리저리 긁어 대었다. 그리고는 별빛 아래의 밤길을 한참을 걸었다.’

이달승, 미술평론




▢ 참여작가 소개
권오봉 / 權五峯 / KWON, O BONG (1954~ )

●개인전
2014 기억공작소-권오봉, 봉산문화회관, 대구
2013 누오보갤러리, 대구
2011 조은숙 ART & LIFESTYLE, 서울
2009 리안갤러리, 대구
2006 서정갤러리, 포항
2005 시공갤러리, 대구
    우손갤러리, 대구
2001 갤러리 M, 대구
1999 시공갤러리, 대구
1992 인공갤러리, 대구
1990 인공갤러리, 대구
1989 인공갤러리, 대구
    갤러리 THAT, 대구
    인공갤러리, 서울
1987 수화랑, 서울
    갤러리 THAT, 대구
1986 갤러리 THAT, 대구
    윤갤러리, 서울

●단체전
2014 아트 파리 2014, 파리, 프랑스
     아트 칼스루에 2014, 칼스루에, 독일
2013 아트 파리 2014, 파리, 프랑스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 싱가포르, 싱가포르
    About to Start... 6인전, 누오보갤러리, 대구
2011 메이드 인 대구, 대구미술관
    아트 페어, EXCO, 대구
2009 9월호 아트지 이슈작가로 선정
    욕망의 정원, KT&G, 대구
    KIAF, 코엑스, 서울
    Spectrum 전, 세종문화회관, 서울
2006 한국 현대미술 6인전, 쟝 프루니에 갤러리, 파리
    토탈 아트 세트, 갤러리M, 대구
2005 KIAF, 코엑스 서울
    A Parallel History, 시안미술관, 영천
    회화의 내면풍경, 우손갤러리, 대구
2004 시공 콜렉션, 시공갤러리, 대구
    화우분분, 문화예술회관, 대구
    6인전, 스페이스 129, 대구
2003 대구 아트엑스포 ‘03, 대구전시컨벤션센터, 대구
    KIAF, 코엑스, 서울
    FIAC, 프랑스, 파리
2002 SEPTEMBER 9, BIBI SPACE, 대전
    대구 화랑협회 창립전, 시공갤러리, 대구
2001 대구현대미술: 오늘을 넘어서, 문화예술회관, 대구
2000 Paradigm Shift, 문화예술회관, 대구
    시공갤러리 기획 5인전, 시공갤러리, 대구
    갤러리M 개관 기획전, 갤러리M, 대구
1999 현대의 신화, 문화예술회관, 대구
    SKIN CARE, 이갤러리, 서울
    회화의 지평에서, 시공갤러리, 대구
1997 일상의 신화, 선재미술관, 경주
1996 캬라반96, 대구 파리 현대미술전, 문화예술회관, 대구
1995 현대미술의 동향, 문화예술회관, 대구
1993 의식과 체험의 다양성, 박영덕화랑, 서울
    현대작가 14인전, 시공갤러리, 대구
1992 대구현대미술 14인의 시각전, 문화예술회관, 대구
1991 3인전, 인공갤러리, 대구
    한국 현대미술 초대전, 선재미술관, 경주
    사각갤러리 개관전, 사각갤러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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